유럽이 미국 기술 차단을 두려워하는 이유: 클라우드 83% 의존과 ‘주권 클라우드’로의 이동
클라우드·이메일이 멈추면 경제도 멈춥니다
유럽이 최근 가장 현실적인 ‘악몽 시나리오’로 꼽는 것은 관세나 무역분쟁만이 아닙니다. 기업과 정부가 매일 쓰는 클라우드, 이메일, 업무용 소프트웨어 같은 디지털 기반 서비스가 어느 날 갑자기 끊길 수 있다는 상상입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그린란드(Greenland)를 둘러싸고 무력 사용 가능성까지 거론했다가 물러서는 과정은, 동맹국 사이에서도 갈등이 급격히 커질 수 있다는 불안을 키웠습니다. 유럽 내부에서는 “그 가능성 자체가 생겼다면 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논의가 단순한 감정적 반응으로 치부되기 어려운 이유는, 유럽 경제의 디지털 동맥이 이미 미국 기업들의 기술 위에 깊게 얹혀 있기 때문입니다. 전력·에너지처럼 국가 핵심 인프라부터 금융, 제조, 공공서비스까지 운영 방식이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로 이동한 상황에서, 특정 국가의 정책 결정 하나가 유럽의 일상적 기능에 직접 충격을 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커졌습니다.
유럽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가격 인상’이 아니라 ‘서비스 중단’입니다
유럽 정책 담당자들이 상정하는 최악의 상황은, 백악관이 행정명령 같은 방식으로 유럽의 데이터센터 접근이나 이메일 소프트웨어 제공을 제한하는 장면입니다. 경제 활동의 필수재가 된 디지털 서비스가 멈추면,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기업 운영과 행정 기능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특히 클라우드는 “서버를 빌려 쓰는 서비스” 정도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재무·회계, 고객관리, 생산계획, 보안, 내부 커뮤니케이션 등 기업의 핵심 기능이 한 덩어리로 얹혀 있는 기반 시설에 가깝습니다.
이런 불안은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이 열린 스위스 다보스(Davos)에서도 뜨거운 화두였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기술 ‘디커플링(decoupling·분리)’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잡하지만 더는 외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반도체 칩부터 클라우드, 인공지능(AI) 모델, 각종 소프트웨어까지 미국 기술이 얽힌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입니다.
숫자가 말하는 의존도: 유럽 클라우드 지출의 83%가 미국 기업으로 갔습니다
유럽의 ‘기술 주권’ 논의가 더 절박해진 배경에는 명확한 데이터가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는 2024년 유럽 고객들이 상위 5개 미국 클라우드 기업의 인프라 서비스에 약 250억달러를 지출했으며, 이는 유럽 클라우드 시장의 83%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이 상위 5개에는 아마존닷컴(Amazon.com, AMZN)의 아마존웹서비스(Amazon Web Services, AWS),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MSFT), 구글(Google)의 모회사 알파벳(Alphabet, GOOGL), IBM(IBM, IBM), 오라클(Oracle, ORCL) 등이 포함됩니다. 유럽이 디지털 전환을 할수록, 그 과실의 상당 부분이 미국 플랫폼 기업으로 흘러간 구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의존은 단지 ‘돈이 나간다’는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공급자가 바뀌기 어려운 구조가 더 큰 위험을 만듭니다. 클라우드와 업무도구는 기업 내부 시스템 깊숙이 연결돼 있어, 다른 사업자로 옮기려면 데이터 이전, 보안 재설계, 운영 방식 변경 등이 동반됩니다. 즉, 위기 상황에서 즉시 ‘갈아타기’가 가능한 상품이 아닙니다.
유럽의 해법은 ‘미국 기술 퇴출’이 아니라 ‘통제권 확보’로 기울고 있습니다
유럽이 목표로 삼는 방향은 미국 기술을 완전히 버리는 급진적 단절이라기보다, 비상시에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안전장치를 확보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유럽의 기업과 정부가 원하는 것은 “규모와 성능은 미국 기업의 기술을 활용하되, 운영과 데이터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은 유럽 안에 두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최근 부상한 개념이 ‘소버린 클라우드(sovereign cloud·주권 클라우드)’입니다. 이는 데이터가 물리적으로 유럽에 저장되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운영 주체·접근 권한·법적 관할이 유럽 규범과 통제 아래 놓이도록 설계한 서비스 모델을 가리킵니다.
미국 빅테크도 ‘현지화’로 응답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일에서 SAP(SAP)의 자회사 델로스 클라우드(Delos Cloud)와의 협력을 확대해, 자사 서비스를 델로스의 소유와 통제 아래 제공하는 방식을 강화했습니다. 최근 1년 사이에는 유럽 고객의 요구에 맞춰 지역 법인을 재정비하고, 이사회 구성도 유럽인 중심으로 꾸리는 등 ‘유럽 내 거점’을 제도적으로 두껍게 만드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아마존은 유럽에서 EU 시민이 운영하고 독일에 기반을 둔 주권 클라우드 서비스를 새로 내놓았습니다. 구글도 여러 유럽 국가에서 현지 기업과 파트너십을 통해 주권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해 왔고, 프랑스에서는 현지 기업이 전적으로 운영하는 합작 구조를 마련해 미국 측의 접근 요구나 감시 우려를 차단하려는 방향을 강조합니다.
유럽이 요구하는 ‘안전한 통제권’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 계약과 제품 구조를 바꾸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기술 주권’이 조달 기준과 입법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는 ‘기술 주권(technological sovereignty)’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공공조달 기준에서 가능한 한 유럽 제품을 우대하는 방향을 지지했습니다. 또한 유럽 클라우드 사업자를 육성하기 위한 새로운 입법 구상도 함께 제시했습니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 집행위원회 측에서도 기술 주권을 촉진하는 법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미국 기술이 만드는 안보 위험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분위기 자체가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유럽이 체감하는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얼마나 급격히 커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국영 투자은행 비피프랑스(Bpifrance)를 이끄는 니콜라 뒤푸르크(Nicolas Dufourcq)가 “유럽 대기업은 유럽 소프트웨어를 써야 한다”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내놓았습니다. ‘편해서’ 미국 기술을 기본값으로 선택해온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유럽이 뒤처진 이유를 인정하면서도, 지금은 규제까지 다시 손보려 합니다
유럽은 과거 휴대전화 혁명에서 노키아(Nokia), 에릭슨(Ericsson) 같은 기업을 앞세워 강한 존재감을 보였지만, 인터넷 시대에는 미국과 중국에 비해 대형 플랫폼 기업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유럽 내부에서는 위험을 회피하는 투자 문화, 국가별로 쪼개진 시장, 까다로운 규제가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는 자성이 반복돼 왔습니다.
그래서 최근 EU가 디지털 규제를 일부 완화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실제 진전은 더디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산업 경쟁력’의 언어만이 아니라 ‘안보’의 언어가 결합되면서 추진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독일은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MSFT) 업무·협업 도구를 대체할 수 있는 오픈소스 기반 솔루션 오픈데스크(openDesk)를 디지털 담당 부처와 일부 연방 기관에서 시험 중입니다. 또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Friedrich Merz) 총리는 11월 프랑스와 함께 디지털 주권 정상급 회의를 열어 EU 기술 규제 완화, 기술 구매에서의 유럽 선호,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 등을 밀어붙였습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은 2기 임기 핵심 과제로 ‘유럽 챔피언’ 육성을 내세우며, 유럽을 대표하는 생성형 AI 개발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미스트랄 AI(Mistral AI)가 대기업 고객을 확보하도록 지원해 왔습니다.
동시에 원자력 발전 기반의 비교적 저렴한 전력을 강점으로 내세워 프랑스에 수백억달러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유치하려는 구상도 강조합니다. 마크롱은 “봉신이 되지 않겠다”는 표현까지 쓰며, 기술 종속을 거부하는 정치적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미국도 마냥 강경해지기 어려운 이유: 유럽은 ‘가장 큰 수출 시장’입니다
이 갈등이 단순히 유럽의 독자 노선 문제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미국 빅테크 입장에서도 유럽이 핵심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기업들은 2024년 유럽에 광고, AI 도구 등을 포함한 ‘디지털 제공 서비스(digitally deliverable services)’를 3,600억달러 이상 수출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알파벳의 경우 3분기 매출 약 300억달러 가운데 29%를 유럽·중동·아프리카(EMEA)에서 벌어들였습니다. 유럽에서 거둔 매출과 투자, 연구개발 거점까지 감안하면, 미국 기업이 유럽을 쉽게 ‘차단’ 카드로만 대하기는 부담이 큽니다.
결국 유럽이 그리는 그림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미국 기술의 성능과 규모는 필요하지만, 비상시에 유럽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통제권과 전환 가능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디지털 생존력’을 높이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 논의가 이제는 구호를 넘어 조달 기준, 법안, 실제 서비스 구조 변경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기술이 국가의 경쟁력을 넘어 국가의 작동 자체를 좌우하는 시대에, 유럽은 “끊길 수 있는 의존”을 “관리 가능한 의존”으로 바꾸려는 실험을 시작한 셈입니다.
참고 출처: Europe Prepares for a Nightmare Scenario: The U.S. Blocking Access to Tech - WS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