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1온스로 원유 80배럴: 원자재 시장의 재정렬이 의미하는 것
‘가격’이 아니라 ‘질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요즘 원자재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어떤 자산이 비싸졌느냐”가 아니라, 자산들 사이의 힘의 관계가 재정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상징적인 숫자가 바로 금 1온스로 원유 약 80배럴을 살 수 있는 수준입니다.
금과 원유는 둘 다 대표적인 실물자산이지만, 이 비율이 이 정도로 금 쪽에 유리하게 기운 것은 지난 35년 동안 거의 없었습니다. 불확실성이 커질 때 사람들이 무엇을 ‘기준 자산’으로 삼는지, 그리고 어떤 자산이 상대적으로 ‘싸다/비싸다’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금이 원유를 압도한 비율이 말해주는 것
금과 원유의 교환비율이 극단으로 치우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번 수준은 지난 35년 동안 딱 한 번 비슷하게 나타난 적이 있는데, 그때는 2020년 팬데믹 공포가 극대화되면서 원유 가격이 잠깐이나마 비정상적으로 흔들렸던 시기였습니다. 평상시의 수급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충격이 시장을 덮었을 때였지요.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결이 다릅니다. 원유가 ‘사라졌다’기보다, 금이 독자적인 상승 모멘텀을 타면서 원유 대비 가치가 크게 올라갔습니다. 이는 단순히 원자재 가격이 들썩이는 정도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현금(통화)보다 믿을 만한 기준이 무엇인가”를 다시 계산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금과 밀의 관계가 보여주는 ‘인플레이션 이후의 세계’
비율 변화는 원유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생활·산업 원자재인 밀과 비교하면 변화가 더 직관적입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금 1온스로 미국 캔자스산 밀 200부셸 정도를 살 수 있었다면, 최근에는 그 1온스가 900부셸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숫자는 “밀이 폭락했다”는 뜻이라기보다, 금이 다른 실물재 전반에 비해 훨씬 더 강해졌다는 메시지에 가깝습니다.
인플레이션이 급등했던 국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의 지정학적 충격, 공급망 불안 같은 사건들이 누적되면서 시장의 ‘안전 선호’가 강화됐고, 그 흐름이 금에 더 강하게 쏠렸다는 그림입니다.
다우지수를 금으로 환산하면: 26년 동안의 ‘숨겨진 하락’
주식시장이 신고가를 찍는 날에도, 금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미국 대표 주가지수인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는 49,000선을 처음 넘어선 뒤 49,462 수준에서 마감했는데, 같은 시점 금 가격(온스당 4,490달러 수준)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다우지수는 금 11온스 정도의 가치로 계산됩니다.
경제학자 피터 시프(Peter Schiff)는 이런 비교가 장기 흐름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1999년 9월에는 다우지수가 금 43온스 이상의 가치였는데, 지금은 11온스 수준이니 금 기준으로는 약 74% 낮아진 셈이라는 계산입니다.
숫자 자체가 주는 함의는 명확합니다. 주가가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구매력이 늘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고, 사람들이 무엇을 ‘진짜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체감 성과가 크게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금의 시가총액 31조 달러”라는 규모감
금이 강해진 흐름은 ‘규모’에서도 드러납니다. 금의 시가총액이 31조 달러 수준에 이르렀고, 이는 단일 자산으로서 가장 큰 규모로 언급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포인트는 기술주와의 비교입니다. 미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Nvidia, NVDA)는 한동안 “미국 최대 상장사”로 거론될 정도로 덩치가 컸지만, 금이 커진 가운데 은의 급등이 겹치면서 시장에서의 상대적 위상이 재정렬되는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은은 2026년 들어서만도 변동이 컸고, 최근 12개월 기준으로는 159% 상승이 언급될 정도로 강하게 움직였습니다.
금이 ‘안전자산’으로 주목받는 동안, 은은 산업 수요와 투자 수요가 겹치며 더 거친 탄력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금과 은이 동시에 강해질 때는 “원자재 전체가 뜨거워진다”기보다, 통화 가치에 대한 불신과 실물자산 선호가 동시에 강해졌다고 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금만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금속 전반의 ‘동반 가속’
원자재 강세는 귀금속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2026년 초반 흐름만 놓고 봐도 구리, 알루미늄, 니켈 같은 산업 금속이 오르고, 백금과 팔라듐 같은 귀금속도 강세를 보였습니다.
구리는 약 6%, 알루미늄은 약 4%, 니켈은 약 10% 상승했고, 백금은 약 17%, 팔라듐은 약 7% 오르는 흐름이 언급됩니다.
이 조합은 시장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건 단순한 경기 반등 베팅인가, 아니면 더 구조적인 변화인가?” 원자재가 한두 품목만 급등하면 일시적 수급 이슈일 수 있지만, 금·은 같은 ‘통화 대체 성격’ 자산과 산업 금속이 함께 강해지면, 그 배경에는 더 큰 프레임이 깔려 있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왜 지금 원자재가 ‘재평가’되는가: 통화, 지정학, 공급망
원자재 재평가의 배경으로는 크게 두 흐름이 함께 거론됩니다.
첫째는 ‘통화 가치 약화’에 베팅하는 심리입니다. 로빈 브룩스(Robin Brooks·브루킹스연구소)는 이 흐름을 이른바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로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재정지출 확대나 통화정책 변화로 통화의 실질 가치가 약해질 수 있다고 보는 쪽이 금과 같은 실물자산을 더 선호한다는 논리입니다.
둘째는 지정학적 균열과 탈세계화입니다. 스트라테가스(Strategas) 소속 이코노미스트들은 경제·정치 질서가 분절되면서, 강대국들이 핵심 원자재와 공급망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구도가 강해졌다고 봅니다.
공급망이 취약해지고, 특정 국가·지역에 집중된 자원이 ‘전략 자산’으로 취급되면, 원자재는 단순한 상품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구성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 달러 약세와 에너지 수요 증가 같은 요인이 겹치면, 시장은 “이제는 원자재를 예전처럼 싸게 조달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가격 체계를 다시 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정렬의 한복판에서 금이 ‘기준점’ 역할을 강화하고 있는 모습이 지금 나타나는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투자자가 여기서 읽어야 할 포인트
이런 숫자들은 ‘금이 더 오를까요, 원유가 더 오를까요’ 같은 단기 예측으로만 소비하기엔 아깝습니다. 오히려 핵심은 비율 자체가 극단으로 움직일 정도로 시장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식이 강해도 금 기준 구매력이 약해질 수 있고, 에너지 가격이 움직여도 금의 흐름이 더 강하면 상대 가치가 크게 바뀔 수 있습니다.
즉, 지금은 개별 자산의 등락보다도 “내 자산이 무엇을 기준으로 가치가 유지되는가”를 점검할 시기입니다. 주식·채권·현금·원자재·금 같은 자산을 함께 놓고, 서로 어떤 관계로 움직이는지까지 보아야 포트폴리오의 체감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출처: An ounce of gold now buys 80 barrels of oil, and other eye-opening stats - MarketWat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