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억 달러 승부수 던진 세일스포스, AI 공포를 잠재우지 못한 이유
인공지능이 친구일까 적일까, 세일스포스가 직면한 'AI 딜레마'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입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AI의 수혜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업에는 성장의 날개가 되지만,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위협하는 파괴적 혁신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전 세계 클라우드 기반 고객 관계 관리(CRM) 시장의 절대 강자인 세일스포스(Salesforce, CRM)가 바로 이 복잡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현지 시각 2026년 2월 25일, 세일스포스는 회계연도 2026년 4분기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매출은 시장의 기대를 충족했고, 주주 환원을 위한 파격적인 정책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시간 외 거래에서 주가는 오히려 3.8% 하락하며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대변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실적은 합격점,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AI 공포'
세일스포스의 이번 4분기 매출은 112억 달러(약 14조 8천억 원)를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12% 성장했습니다. 이는 시장 분석가들의 예상치인 111억 9천만 달러에 부합하는 수준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작년에 인수한 데이터 통합 전문 기업 인포매티카(Informatica)의 기여입니다. 이번 분기 매출 중 약 3억 9,900만 달러가 인포매티카에서 발생하며 외형 성장을 견인했습니다.
또한, 기업들이 미래에 지불하기로 약속한 수주 잔액을 의미하는 '잔여 이행 의무(RPO)' 역시 351억 달러를 기록해 예상치였던 345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지표상으로만 보면 세일스포스는 여전히 탄탄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세일스포스가 제시한 2027 회계연도 전체 매출 가이던스는 458억 달러에서 462억 달러 사이입니다. 이는 시장의 기대치였던 461억 1천만 달러와 비교했을 때 다소 모호하거나 보수적인 수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특히 투자자들은 소프트웨어 산업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AI 디스어랍션(Disruption, 파괴적 혁신)'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이전트포스(Agentforce)가 보여준 희망과 과제
세일스포스의 수장 마크 베니오프(Marc Benioff) 회장은 이러한 시장의 우려를 정면으로 돌파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실적 발표에서 "자율형 AI 에이전트(Agentic AI)는 우리 비즈니스의 강력한 순풍"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그 중심에는 에이전트포스(Agentforce)가 있습니다. 에이전트포스는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챗봇을 넘어, 스스로 판단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AI 비서 서비스입니다. 이 서비스의 연간 반복 매출(ARR)은 전년 대비 무려 169% 급증한 8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세일스포스는 AI가 고객에게 제공하는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에이전틱 워크 유닛(Agentic Work Units)'이라는 새로운 지표까지 도입하며 AI 기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과거의 고객 관리가 직원이 일일이 이메일을 보내고 데이터를 입력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AI 에이전트가 고객의 구매 패턴을 분석해 적절한 시점에 상담을 제안하고, 직접 예약을 잡거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식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적은 비용으로 더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는 혁명적인 도구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지점이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AI가 너무 똑똑해져서 사람의 일을 대신하게 되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사람 머릿수'대로 돈을 받던 기존의 구독 모델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I가 업무를 다 처리해주는데, 굳이 비싼 라이선스를 많이 살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죠.
주주를 달래기 위한 500억 달러의 승부수
시장의 차가운 시선을 돌리기 위해 세일스포스는 강력한 당근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로빈 워싱턴(Robin Washington)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500억 달러(약 66조 원) 규모의 대규모 자사주 매입 프로그램을 발표했습니다. 동시에 분기 배당금도 주당 44센트로 약 6% 인상했습니다.
자사주 매입은 회사가 시장에서 유통되는 자기 주식을 사들여 없애는 것으로, 주식의 희소가치를 높여 주가를 방어하는 대표적인 주주 환원 정책입니다. 500억 달러라는 금액은 세일스포스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으로, 회사가 현재의 주가 하락을 방어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셈입니다.
베니오프 회장은 실적 발표 방식에도 변화를 주었습니다. 딱딱한 컨퍼런스 콜 대신 '어닝 쇼(Earnings Show)'라는 파격적인 형식을 도입하고, 샤크닌자(SharkNinja, SN)나 윈덤 호텔 & 리조트(Wyndham Hotels & Resorts, WH) 같은 주요 고객사 CEO들을 초청해 자사 제품의 효용성을 직접 증명하게 했습니다. 기술 관료적인 접근보다는 비즈니스 가치를 강조하는 마케팅적인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2030년을 향한 항해: 위기인가 기회인가
세일스포스의 주가는 올해 들어서만 약 25% 하락했습니다. 이는 세일스포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기존 소프트웨어 강자들이 도태될 수 있다는 시장 전반의 공포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경영진은 여전히 낙관적입니다. 베니오프 회장은 2030 회계연도까지 매출 63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본업인 유기적 매출 성장세가 다시 가팔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내놓았습니다.
결국 세일스포스에게 남겨진 숙제는 하나입니다. AI가 기존 매출을 갉아먹는 '카니발라이제이션(자기 잠식)'을 넘어서, AI 자체가 새로운 수익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숫자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에이전트포스의 폭발적인 성장이 전체 매출 구조를 어떻게 재편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익성을 어떻게 유지할지가 관건입니다.
글로벌 경제의 디지털 전환을 이끌어온 세일스포스가 AI라는 거대한 파도를 타고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파도에 휩쓸려 과거의 영광 뒤로 사라지게 될까요? 실리콘밸리의 상징적인 마천루, 세일스포스 타워에 쏠린 전 세계 투자자들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습니다.
참고 출처:
Silver tops gold as investors’ go-to hedge against trade tensions - MarketWatch
